고구려의 후예라는 라후(Lahu)족에 대해
| 487642 | 고구려의 후예라는 라후(Lahu)족에 대해 |
중국 윈낭성과 타이, 미얀마 국경 근처에 살고 있다는 라후족에 대해 읽었습니다.
정말 그 사람들 말은 한국말의 사투리라고 할 정도로 똑같고, 북한 사투리와 비슷하나요?
그들이 정말로 고구려의 후예라면 우리하고 생긴 것도 비슷하나요?
그들이 우리 동족이라고 하면 그들이 지금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하니까, 민족적 차원에서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언젠가 제가 직접 찾아가서 만나 보고 싶지만, 아직 학생신분이라.....
라후족에 대해 아시는 대로 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고구려의 후예라는 라후(Lahu)족 | 문제제기 진행중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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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자 평 : 다만, 라후족의 인구통계는 중국 윈낭성에 있는 사람들 수만 40만명이 넘는다는 자료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좀 이상하네요..^^; | |
| 라 후 족 - LAHU (무서, 무수르 Musur) 전체촌락수 421 전체가구수 13,307 전체인구수 73,252 ○ 이동경로 - 라후족들이 자신들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농우는 어디며 또 북방 흰 눈이 내리는 나라는 어디일까?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망한 다음해 당나라는 20만 명이 넘는 고구려 사람들을 붙잡아 갔다가 돌려보냈는데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당나라는 수만 명의 고구려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중국 서북쪽의 불모지 농우에 내팽개쳐 버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농우는 지금의 청해성 동남부와 감숙성 남부, 한때 라후족들이 살았다는 전설 속의 장소 농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흰눈이 오는 나라는 한반도와 만주 벌판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지금도 한국 사람이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이 흔적처럼 남아 있다. - 라후족은 원래 티벳과 가까운 중국의 운남성일대에서 살았다. 후에 중국 정부당국과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어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한족의 압제에 견디다 못한 대부분의 라후족은 미얀마로 넘어갔고, 그 일부는 태국과 라오스로 넘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라후족은 19세기에 들어와서야 태국으로 넘어왔다. 오늘 날 대부분의 라후족은 북부지방인 치앙라이, 치앙마이, 매홍손 등지에 살고 있다. - 라후족의 태국식 명칭은 '무서 (또는 무수르)' 인데 이는 사냥꾼이라는 뜻의 미얀마어에서 따온 말이다. 하지만 모든 라후족은 무수르라는 명칭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라후라고 부르고 있다. 라후족에는 라후 니(붉은 라후), 라후 나(검은 라후) 라후 시(노란 라후) 라후 푸(흰 라후) 및 라후 셸레 등의 하위부족이 있다. ○ 언어 - 라후족 언어는 아카족과 리수족 언어와 비슷한 부분이 상당히 많으므로, 통역하는 사람이 없어도 서로의 언어를 알아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다. 라후의 언어중에는 고대 중국어에서 차용한 단어도 있다. - 라후족 사람들은 대부분 라오타이어와 라오어를 할 줄 안다. 연안어를 할 줄 아는 라후족도 있고, 미얀마에서 이주해온 이들은 미얀마어를 할 수도 있다. 1920년대 이후 라후 나(검은 라후)족의 문자는 기독교 공동체 사이에서 발전하여 확산되고 있다. ○ 촌락 및 가옥 - 라후족은 전통적으로 산의 중턱에 촌락을 이루고 산다. 촌락은 대체로 규모가 작으며, 가옥은 마을의 도로변에 짓는 경우가 많다. 촌락의 어떤 지점에서는 세로로 반을 쪼갠 대나무 줄기로 수로를 만들어 물을 멀리까지 보내기도 한다. 이 대나무 수로는 기둥을 세워 지탱한다. - 촌락마다 눈에 띄는 장소에 제례를 치르는 곳을 두고 있다. 라후 셸레의 마을에서 이런 장소는 축제나 행사때 신성한 춤을 추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라후 니(붉은 라후) 촌락에는 이 장소에 자신들이 믿는 신의 제단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기독교를 믿는 라후 나(검은 라후) 와 라후 시(노란 라후) 의 촌락에는 교회가 서 있다. - 라후족 가옥은 작고 가볍게 지어진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은 대나무와 야자수 잎을 이용하고, 통나무로 기둥을 세워 단 하룻만에 후딱 집을 만들어 버린다. 주택내부에는 한 두 개의 침실과 거실이 있으며 난로가 적어도 하나씩은 마련되어 있다. 방 한가운데 난로를 두어 취사에 이용한다. - 라후는 고생을 해서라도 부슬부슬한 안남미보다는 찰기가 있는 찹쌀로 지은 밥을 먹으려 든다. 때문에 라후족의 마을에서는 항상 찰기진 밥을 먹을 수 있기도 하다. 라후족에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된장이나 김치 등도 있다. (물론, 고춧가루가 없는 하얀 배추절임같은 것이다. 한국의 김치가 붉은 것은 고춧가루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부터이다.) ○ 경제와 풍습 - 라후니(붉은 라후) 와 라후나(검은 라후) 는 주로 아편을 재배하며 이는 고추 및 야생조류고기 말린 것과 더불어 중요한 현금수입원이 된다. 또한 벼와 옥수수와 그밖의 다양한 채소류를 재배한다. 게다가 돼지와 닭도 키우는데 이것은 팔기 보다는 먹기 위한 것이다. - 농사는 주로 화전을 이용해 짓는다. 대부분의 경지는 기껏해야 삼년정도만 곡식을 심고 그 후엔 내버려두어 갈대숲이 된다. 수렵 또한 라후족 경제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한다. 사냥한 짐승은 식용으로 쓰기도 하고 평지에 사는 이들에게 팔기도 한다. 라후 셸레족도 화전민이며 2차 현금수입원으로 돼지를 기른다. 고추도 환금작물로서 점점 중요해 지고 있다. - 라후의 여인네들 역시 어릴때부터 자수를 비롯한 뜨개질을 배운다. 처녀들은 부지런하여, 자신이 입을 옷 이외에 미래의 신랑이 될 사람의 옷까지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남자들 역시 부지런하여 이른 아침부터 밭에 나가 일을 시작한다. - 라후족에게 있어 음악과 춤은 생활속에 배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상 즐거운 노래소리가 울려퍼지는 마을에는 축제도 자주 벌어진다. 축제날이 되면, 여자들은 그동안 준비해 두었던 예쁜 옷을 입고나와 춤을 추고, 남자들은 풀잎으로 피리를 만들어 음악을 연주한다. 대나무를 이용해 '여러개의 관이 달린 스코틀랜드식의 피리'와 비슷한 것을 만들어 불기도 한다. - 마을 사람중에 한명이 병이 나면, 사람들은 그 주위에 모여 춤과 노래를 부르는 의식을 하여, 악귀를 쫓아 낸다. 마을의 부족장은 제사장의 역할을 함께 하여 결혼이나 장례를 주관하고, 길흉을 점치기도 한다. 부족장의 권한은 막강하여, 마을은 부족장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 따라서 부족장이 죽거나 새로운 부족장이 들어서면, 마을의 이름도 바뀌게 된다. - 라후족은 콩을 쑤어서 만든 된장을 먹는다. 우리나라의 된장과 거의 흡사한 것이며, 야채를 소금에 절인 '와찌' 라는 것도 먹는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김치와 비슷한 것이다. 명절이 되면, 찹쌀을 대나무통에 넣고, 숯불속에 넣어 밥을 쪄 먹는다. - 라후족의 음식은 김치·된장 등 우리 음식과 비슷한 것이 많아 잘만 찾아 먹으면 식사때 고민스럽지 않다.불편한 점은 무엇보다 고도가 높아 도착해 며칠동안은 고산병 증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머리가 띵하고 무기력해진다. ★ 잊혀진 우리 핏줄 아카 라후 리수 - 소수 민족을 연구해온 학자들은 태국의 고산족이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 군사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가 오지에 버려졌던 고구려의 후손들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인 3만 8천 3백호를 잡아가 중국 남쪽 광막한 땅에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학자들뿐 아니라 소수민족 출신의 호례극이라는 중국 학자도 같은 의견을 내놓는다. 이들 고산족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그랬듯이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고, 결혼 때 닭을 옆에 두고 식을 올린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은 것도 우연으로 돌릴 수만 없는 고구려 옛 풍습 그대로다. 아카족 같은 경우는 구슬을 머리에 달고 장식하기를 좋아하는데 이 또한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중국 후한서에 '동이족은 구슬 장식을 즐긴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 북한 사투리 '나 메홍손 가메' 학자들의 얘기가 아니더라도 한국 여행자들이라면 이들이 우리 핏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절 때 색동옷을 입는 것이 그렇고 태국 사람들은 별로 좋아 하지 않는 끈기있는 찰벼를 산간에서 재배하는 것도 그렇다. 된장이나 김치를 담가먹는 것까지 우리를 닮았다. 무엇보다 신비한 것은 이들의 말이 중국이나 태국말처럼 주어 동사 목적어 순이 아니고 우리말처럼 주어 목적어 동사 순이라는 것이다. 라후족이이나 아카 리수족이 한결같이 나를 '나'라고 하고 너를 '너'라고 하는 것을 들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지구상에 한국인 말고 어느 민족이 나를 나라고 하고 너늘 너라고 할 것인가 말이다."나 매홍손 가이메이" 라후족의 말로 나 매홍손에 간다는 뜻이다. 이 말을 어찌 들어보면 "나 매홍손 가메" 라는 북한 사투리만 같지 않은가? 어쨋든 이들을 만나면 우리와 같은 핏줄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들을 우리 민족이 아니고는 세계의 어떤 민족과도 동일시할 수 없을 것이다. <최승언(자유기고가) / 사진=조선일보사진자료실> ★ 우리와의 유사점 - 외모도 태국보다는 우리네와 더 비슷했다. - 집안의 아궁이를 쓰는 것도 우리네와 닮았다. - 명절 때 색동옷을 입는 것 - 태국 사람들은 별로 좋아 하지 않는 끈기있는 찰벼를 산간에서 재배하는 것. - 된장이나 김치를 담가먹는 것까지 우리를 닮았다. - 이들의 말이 중국이나 태국말처럼 주어 동사 목적어 순이 아니고 우리말처럼 주어 목적어 동사 순이라는 것이다. - 고구려 사람들이 그랬듯이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고, 결혼 때 닭을 옆에 두고 식을 올린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은 것도 우연으로 돌릴 수만 없는 고구려 옛 풍습 그대로다. - 라후족·아카족 등이 개고기를 먹는다. - 라후족도 아기를 낳으면 문밖에 인줄을 쳐 일정기간 외부 사람들이 집안으로 못 들어오게 한다고 했다.라후족의 인줄은 지푸라기를 사용해 왼새끼를 꼰 후 새끼줄 사이사이에 창호지·숯·빨간고추(사내아이의 경우)·푸성귀를 꽂아 놓는다.그런데 탐사팀을 놀라게 한 것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인줄에 푸성귀를 꽂았다고 하는데 라후족은 지금도 푸성귀를 꽂는다는 사실이었다 - 라후족의 명절이나 제사에서 찾을수 있는 유사성 라후족의 설은 우리나라 처럼 1년중 가장 큰 명절로 떨어져있던 가족과 만나고 이웃 부락과의 교류를 통해 한해동안의 풍년과 평온을 기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이 특정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농사에 적절한 시점에 따라 부락마다 해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명절을 보내는 일반적인 모습에는 많은 유사성이 보인다. '까끄뵈'라는 라후족의 새해 첫날 아침에는 세심하게 만든 색동옷을 입으며, 마을한가운데 제사음식을 올려두고 발을 엇갈리면서 주변을 도는 것은 땅을 밟아 땅의 신을 자극하여 한해의 평온과 풍년을 기원하는 단체 의식을 치르는 데 이것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전하는 고대 마한의 제천의식을 연상시키는 지신밟기와 비슷하다. ★ 관련글과 말 - 실크로드, 길 위의 노래/전인평 지음/398쪽 소나무 "‘고구려 유민의 후손’설이 제기되고 있는 태국 라후족의 노래가 강원도 민요와 유사하다는 분석도 눈길을 끈다." - 우리말...........................라후족말 나도 너도........................나터 너터 나는 서울로 가요.................나래 서울로 까이요 서울에서 방콕까지 가요...........서울에 방콕까가 까이요 나에게 와요......................나게 라웨요 갈려나 올려나....................까일레나 라일레나 - 소설 치망마이 / 김병호 ★ 참고싸이트 http://www.baggyz.com/travel/tribe.htm#lahu http://www.eurasiad.com/nomad_map20.html http://www.sirius.waa.to/Thai/Chiangmai.html http://myhome.shinbiro.com/~chiangra/culture2/culture2-26.htm 조선일보 1999/11/25일자 기사 http://www.happycampus.com/pages/2003/04/25/D1200190.html http://chiangrai.cafe24.com/board/zboard.php?id=data&no=48 http://www.kale.com.ne.kr/life-127-3.htm |
| 내용출처: 인터넷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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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 끌려간 고구려인의 후예라고 알려져 있는 Lahu족의 언어는
라후족 (拉祜族) | 세계의 종족 2004.09.17 00:22 라후족들은 친척관계를 제대로 따지지 못하는 것도 특이하다. 친가 쪽이나 외가 쪽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위아래가 없이 두리 뭉실하게 나이만을 따져 형(어비), 동생(어니)의 호칭으로만 부른다. 우리식으로 삼촌, 아저씨, 고모, 이모, 조카 등의 호칭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들이 결혼할 때 촌수를 따지기는 하지만 대개 6촌이 벗어나면 누구와도 결혼 할 수가 있다. 라후족은 다른 부족에 비해 아내를 끔찍이도 위한다. 즉, 여성상위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라후족이 이렇게 된데는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있다. 라후족은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저자의 졸저 ‘치앙마이’ 참조) 어쩌면 다음의 이야기 가운데는 우리민족이 잃어버린 역사의 한 단면이 들어있을 수도 있으니 귀담아 들어보자. 옛날 어느 땐가 라후족은 중국과의 국경지대에서 지배자로 살았었다. 라후족의 지배 하에서 살았던 중국인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라후족과 중국 사람들은 여러 차례 전쟁을 했지만 그때마다 라후족이 이겨서 중국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라후족 남자들이 밖으로 일을 하러 나간 틈을 타서 중국 사람들이 장사치로 변장을 하고 성 안으로 들어왔다. 중국 사람들은 옥피리를 가져와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라후족 여인들을 유혹했다. 라후족 여인네들은 옥피리가 너무나도 탐이 나서 돈을 많이 주고 사려고 했으나 중국 사람들은 팔지를 않했다. 중국 사람들은 옥피리를 주는 대가로 석궁(石弓)의 방아쇠를 달라고 했다. 라후족 여인들은 옥피리를 가지고 싶은 욕심에 이성을 잃고 남편들의 석궁에서 방아쇠를 빼 내어 옥피리와 맞바꿔 버렸다. 즉시 중국군대가 쳐들어 왔다. 라후족 남자들이 허겁지겁 성 안으로 들어와 싸우기 위해 석궁을 찾았으나 이미 방아쇠가 없어진 석궁은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남자들은 싸울 수 없어 급히 성 밖으로 몸을 피했다. 남자들은 성 밖에서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도 성안에 남아있는 처자식이 걱정이 되어 어떻게 하면 빼 내어 올 수 있을까 궁리를 했다. 그 날 밤 남자들은 호로생황을 불어서 그들의 아내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아내들은 남편들의 속 타는 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태평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왜냐하면 성을 차지한 중국 사람들이 아내들을 잘 보살펴(?)주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안타까운 남편들은 성으로부터 처자식을 끌어 내 오기위해 성 안에서 버티고 있는 아내들에게 약속을 한다. 앞으로 아내들을 잘 보살펴주고, 아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던지 들어 주기로 한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아내들은 자기네들의 권리를 주장하여 남편들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 날 밤 라후족의 아내들은 중국 군대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자식들을 데리고 성을 빠져 나왔다. 라후족들은 처자식을 데리고 새 땅을 찾아 이동 해야만 했다. 이것이 왜 라후족이 오늘날 유랑민이 되어 가난해졌으며, 대신 아내를 끔찍이도 잘 보살펴 주는가에 대한 이유란다. 정상인의 시각으로 보면 라후족의 전설은 도대체 사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석궁의 방아쇠를 주고 옥피리를 산 아내들의 잘못으로 성을 빼앗겼는데도 아내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깨닫지도 못하고, 남편들이 잘 대해 줄 것을 다짐 받고서야 성밖으로 나왔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학대를 당하고 살았던 처지도 아닌 듯싶다. 왜냐하면 남편들은 밖으로 일 하러 나갔는데도 아내들은 집 안에 있었고, 더욱이나 돈을 많이 주고 옥피리를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라후족이 중국과 싸웠던 것은 언제 어디서였을까? 그들의 역사와 언어, 민속 그리고 유전인자를 조사해 보면 라후족은 오갈 데 없는 고구려인들의 후예, 혹시 고구려가 중국과 국경을 하고 대치하고 있었던 오늘날의 요녕성 남부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라후족은 소수민족 가운데서는 드물게도 일부일처제로 다른 부족에 비해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돕고 화목하게 잘 산다. 라후족 가정을 찾아가 보면 대나무로 엮은 원두막 같은 집일망정 그 안에서 부부, 시집간 딸, 사위,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자식들과 함께 불편 없이 산다.
라후족이 연애하는 것을 보면 현대화된 우리의 시각으로는 부도덕한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원초적인 인간성으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낭만적이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라후족의 연애하는 장면을 저자의 졸저 ‘치앙마이(매일경제신문사)에서 옮겨와 보자.
이윽고 보름달이 동산 위에 떠오르면서 이들의 분위기는 점점 들뜨기 시작했다. 처녀들은 낮 시간에 미리 만들어 놓은 주먹만한 찰밥덩어리를 들고 총각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닌다. 이것이 바로 라후족 처녀들이 그날 밤 즐기고 싶은 섹스 상대를 고르는 의식이다. ....... 과연 찰밥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못이나 바늘이 들어 있을까. 아니면 그날 밤 섹스 상대가 되어 달라는 표시인 바나나 나 삶은 콩이 들어 있을까 ]
처녀가 임신을 하면 어느 총각의 씨 인가를 생각해 내야만 한다. 그런 다음 임신을 시켰다고 생각되는 총각의 집으로 찾아가서 결혼을 하자고 한다. 대개는 처녀의 말에 따라 결혼을 한다. 그러나 총각이 자기의 자식이 아니라고 부정을 하는 경우는 신의 저주를 받은 처녀라는 누명을 쓰고 마을에서 쫒겨 난다. 라후족의 결혼도 평범하지 만은 않다. 처녀가 총각과 연애를 했거나 임신을 하면 총각 집에서는 중매쟁이를 처녀의 집으로 보네 청혼 절차를 밟아야 한다. 처녀의 부모는 총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쩔 수가 없다. 중매쟁이가 위협적인 말을 하기 때문이다. “ 둘이서 도망을 치는 것 보다 차라리 축복을 해 주는 것이 나을꺼요 ” 이렇게 해서 처녀 부모의 승낙이 떨어지면 결혼식을 거행한다. 결혼식이 끝나면 신랑은 자기의 옷가지며 농사짓는 연장을 가지고 와서 처가살이가 시작된다.
라후족은 사람이 죽으면 밤을 세워 시신을 지킨다. 왜냐하면 밤에 고양이가 몰래 들어와서 시신을 세 번만 타 넘으면 시신이 불끈 일어선다는 공포스러운 미신을 믿기 때문이다. 다음날 가족들은 시신을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힌다. 다음 새끼줄로 시신을 5곳에 묶는다. 시신을 관에 넣은 다음 민상여에 올려놓고 깊은 산속으로 떠 매고 간다. 무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 일수록 좋다고 한다. 관을 땅 속에 묻은 후 가족들은 사자가 평소에 사용했던 그릇과 활, 칼등의 사냥에 사용했던 무기들을 무덤 주위에 놓아둔다. 이렇게 하는 것은 죽은 자가 생시에 잡았던 짐승들의 영이 덤비면 쏘아 죽이라는 뜻이다. 일년에 두서너 차례 산소를 찾아가서 성묘를 하고, 벌초도 한다. 아무튼 라후족이 장사를 지내는 모양을 보면 한반도에서 사는 우리의 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 그들이 과연 우리의 누구인가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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